
사랑의 이해
2016년 한겨레문학상 수상작가 이혁진의 신작 장편소설 『사랑의 이해』. 은행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네 남녀의 발칙하고 속물적이고 사실적인 사내 연애를 그린 작품으로, 회사로 표상되는 계급의 형상이 우리 인생 곳곳을, 무엇보다 사랑의 영역을 어떻게 구획 짓고 사랑의 행로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자세하게 담아냈다.
하상수 계장은 옆자리의 안수영 주임을 좋아하지만 둘 사이의 감정은 얽힌 실타래처럼 답답하게 꼬여 있다. 그러던 중 안수영 주임이 청원경찰인 종현과 호감을 주고받는 관계라는 사실을 눈치 챈 상수는 수영을 향한 마음을 접고 능력 있는 상사 박미경 대리와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서서히 가까워진다. 한편 종현이 연거푸 경찰 시험에 떨어지며 둘 사이에는 미세한 불화의 조짐이 싹트고, 상수는 자신을 압도하는 미경에게 자격지심과 열등감을 느끼고 있는 스스로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데…….
은행이란 공간은 말없이 존재하는 배경인 동시에 모든 말들의 배경이기도 하다. 교환가치를 바탕으로 선택이 이뤄지고 선택이 또 다른 가치를 만들어 내는 은행은 자본주의의 꽃이자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보편적인 사고방식을 상징이기도 한다. 소설의 표면은 방황하는 연인들의 연애담이지만 그 이면은 설렘과 환희를 비롯해 자격지심, 열등감, 자존심, 질투, 시기심 등 사랑을 둘러싼 감정들, 즉 사랑할 때 우리가 말하는 것들과 이별할 때 우리가 침묵하는 것들에 대한 재발견으로 가득하다.
- 저자
- 이혁진
- 출판
- 민음사
- 출판일
- 2019.04.19
#1. 행복의 모양
107p 자신이 원하는 것은 미경이 아니었다. 미경은 다다르고 싶던 결승선이 아니라 지금껏 달려온 궤도의 어느 지점, 무수히 지나온 분기점에 불과했다. 멈춰서야 했다. 그나마 지금이 멈춰 설 수 있는 유일한, 최후의 찰나였다. 하지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109p 선택인 듯 보이지만 실은 모두 궤도 위에 이미 존재하는, 안전하고 예정된 과정의 매듭에 불과한 것. … 하지만 상상하는 성공과 행복의 장면이 우스꽝스러울만큼 엇비슷했다. 어차피 같은 목적지라면 왜 굳이 험한 길을 택하거나 그런 길을 택한 척 가식을 떨어야 할까. 검증된, 효율적이고 안전한 궤도를 놔두고.
> 그럼에도 상수가 미경을 선택하지 않은 것은 결국 사랑에는 효율성과 검증보다 더 큰 영향력을 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뜻이겠지?
148p 행복이란 꾸미고 연출한 인상뿐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모두 엇비슷해 보이는 것인지도. … 행복에는 늘 거짓이 그림자처럼 드리우기 마련인 듯 했다. 아니, 거짓은 조명일지도 몰랐다. 행복이라는 마네킹을 비추는 밝조 좁은 조명.
187p 행복은 싸구려 인화지에 뽑은 사진. 좁은 계도의 색상 속에서 엇비슷하게 웃는 얼굴들과 위치만 다른 브이자 손가락만 보이고, 그나마도 쉬 퇴색해서 쭈글쭈글해진다.
#2. 그들의 사랑의 끝엔
304p 수영과는 아직 아무 사이도 아니었다. 육체적 접촉도 전혀 없었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관계였다. 하지만 감각은 사무치도록 사실적이고 명징했다.
328p 사랑했지만 사랑을 믿지는 않았다. 사랑을 원했지만 사랑만 원한 것은 아니었다. 그것을 종현이나 상수에게 구하려고 했을 뿐 자신에게서 구하려고도, 차라리 깨끗이 체념해 버리지도 않았다. (중략) 모든 것을 자신이 망쳤다고 할 수 는 없지만 자신이 망칠 수 있는 것은 모두, 스스로 망쳐버린 것이다. 자신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사치와 자유로, 유혹하고 유혹당할 수 있는 그 힘과 권리로.
#3. 섬광탄
35p 막상 둘만 있게 도니 머릿 속은 섬광탄이 터진 것 같았고 가슴은 창피할 만큼 두근거렸다.
303p 한 번, 섬광처럼 반짝이지만 그대로 끝이 나고 연극의 암전처럼 곡은 닫히지 (쇼팽 왈츠 9번, 작별의 왈츠)
313p 시구(詩句) 같은 섬광이 번뜩였다.
#4. 목표를 앞두고
152p 불안은 자신을 매일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했지만 조금씩 부식시키기도 하고 있었다.
160p 빠르게 달릴수록 가까운 풍경은 흐릿하게 흘러가니까. 그렇게 흘려 지나치도록 달려야만 목표에 가까워질 수 있으니까.
#5. 좋아하는 모양
63p 서로 다정하게 바라보면서도 조금씩 엇갈렸고 주위를 맴돌았다. 다르면서도 비슷한 각자의 이유로 상대방의 발을 밟지는 않은 채, 끊어질 듯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멈춰 설 듯 하다가 다시 시작하는 춤을 췄다.
66p 요만한 걸 만들어서 요렇게 걸어 놓고 애지중지하는게 아니라 사람들한테 내놓는 거잖아요. 세상에 던지는 거잖아요.
108p 좋다고 다 갖고 싶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갖고 싶지 않다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다. 좋다는 것은 그런 뜻이었다.
#6. 작가의 말
사랑이 다른 감정들과 다르다면 결국 우리를 벌거벗게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에곤쉴레의 나체화)
- 벌거벗은 자신을 바라보는 것도, 벌거 벗은 상대방을 지켜보는 것도 쉬운일이 아니다. 자존심, 질투심, 시기심 같이 사랑을 둘러싼 감정들과 온갖 생활조건들은 오히려 더 갖춰 입고 뻔뻔해질 것을 요구하기 까지 한다. 하지만 사랑한다면, 사랑을 원한다면 결국 거짓의 밝고 좁은 조명 아래서든, 거울처럼 자신을 비추는 짙은 어둠안에서든 입고 껴입을수록 더 헐벗고 뒤틀리기만 하는 잣니을 마주할 수 밖에 없지 않을까. 이 이야기 안의 상수와 수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것이 여느 감정과 다르며 자신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수많은 사람 속에서 다르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역시 수영과 상수가 이야기 끝에서 그렇게 알게된 것처럼.
- 하지만 어떤 것도 주장하고 싶지는 않았고 그럴수도 없다. 사랑은 각자의 것이고 그래야 하니까.
** 껴입을수록 더 헐벗고 뒤틀리는 (온갖 생활의 조건을 입고 뻔뻔, 계속해서 이해타산적인 마음으로 사랑을 한다면 계속해서 꼬여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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