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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LOG/문장 큐레이션

스토너, 존 윌리엄스 / 발췌록 / 필사 / 느낀점

by this_summer (이여름) 2023. 4. 8.
스토너(초판본)
“이 소설에 대해선 할 말이 너무 많아서 나는 제대로 시작할 수조차 없다.” _신형철(문학평론가) 전 세계 수많은 문학 애호가들의 인생 소설로 손꼽히는 명작 《스토너》가 1965년 미국에서 처음 발행됐을 때의 표지로 출간된다. 50여 년 전, 이 책의 초판은 출간 1년 만에 절판되었지만 2010년대 영국, 네덜란드, 프랑스를 비롯해 유럽 전역에서 재출간되며 역주행 베스트셀러 신화를 쓴다. 이 책을 두고 평론가 모리스 딕스타인은 “당신이 여태껏 들어본 적 없는 최고의 소설”이라 극찬했으며, 영국의 유명 작가 닉 혼비, 이언 매큐언, 줄리언 반스는 물론 수많은 국내 명사와 독자 역시 애정을 드러냈다. 이번 에디션에서는 기존 판의 문장을 다듬고 문학평론가 신형철의 추천사 전문을 실었다. 또한 초판에 담긴 일러스트레이션을 완벽히 재현했다. 주인공 스토너가 평생을 보낸 대학에 있는, 화재로 모든 게 스러지고 기둥만 남은 어느 건물 그림이다. 폐허가 된 자리에서도 기둥만은 불쑥 솟아 괴상하지만 아름다운 풍경을 보여준다. 이는 스토너가 받아들인 삶의 방식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더욱 큰 의미가 있다. 이 작품은 묵묵히 자신의 길을 걷고자 했던 한 남자에 대한 이야기다. 스토너는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농과대학에 입학하지만, 부모님의 바람과 달리 전공을 영문학으로 바꾼다. 전쟁의 열기가 젊은이들을 휩쓸고 갈 때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교수직에 몸담은 뒤에도 출세의 뜻을 내비치지 않는다. 조용하고 소박하게, 그러나 쉬지 않고 열정을 좇아가는 스토너를 보며 특별한 감동에 젖을 수 있다. 평생 한곳에 살았던 스토너가 문학을 통해 자신의 공간을 넘어서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던 것처럼, 당신 또한 《스토너》 초판본을 통해 이 소설이 견뎌낸 수십 년의 시간을 건너뛰는 경이로움을 경험하기를 바란다.
저자
존 윌리엄스
출판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일
2020.06.24


#1. 시간의 흐름

순간과 순간이 나란히 놓인 것 같으면서도 서로 소외되어 있어서, 그는 자신이 시간과 동떨어진 곳에서 고르지 못한 속도로 돌아가는 커다란 디오라마(배경 위에 모형을 설치하여 만들어낸 장면)를 보듯이 시간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지나온 과거의 또 다른 한 부분이 거의 알아보기 힘들 만큼 천천히 그에게서 멀어져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있음을 절감했다.
이제 자신은 예순 살이 다 되었으므로 그런 열정이나 사랑의 힘을 초월해야 마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는 초월하지 못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초월하지 못할 것이다. 무감각, 무심함, 초연함 밑에 그것이 아직도 남아있었다. 강렬하고 꾸준하게. 옛날부터 항상 그곳에 있었다. 젊었을 때는 잘 생각해 보지도 않고 거리낌 없이 그 열정을 주었다. 아처 슬론이 자신에게 보여준 지식의 세계에 열정을 주었다. 그게 몇 년 전이더라? 어리석고 맹목적이었던 연애시절과 신혼시절에는 이디스에게 그 열정을 주었다. 그리고 캐서린에게도 주었다. 그때까지 한번도 열정을 주어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그는 방식이 조금 기묘하기는 했어도, 인생의 모든 순간에 열정을 주었다. 하지만 자신이 열정을 주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했을 떄 가장 온전히 열정을 바친 것 같았다. 그것은 정신의 열정도 마음의 열정도 아니었다. 그 두가지를 모두 포함하는 힘이었다. 그 두가지가 사랑의 구체적인 알맹이인 것처럼. 상대가 여성이든 시든, 그 열정이 하는 말은 간단했다. 봐! 나는 살아 있어!

세상 그 누구보다도 평온하고 고요한 듯 보였던 스토너는, 사실 '열정'에 가득 찬 사람이었다. 요란하지 않은, 목적지를 향해 돌진하는 그런 열정으로. 그래서 그 외의 것들은 오히려 잔잔하고 별 것 아닌 것처럼 보였다.

그는 지혜를 생각했지만, 오랜 세월의 끝에서 발견한 것은 무지였다.

 

#2. 장래

그는 자신의 장래를 수많은 사건과 변화와 가능성의 흐름이라기보다 탐험가인 자신의 발길을 기다리는 땅으로 보았다.
그에게 장래는 곧 웅장한 대학 도서관이었다. 언젠가 도서관에 새로운 건물들이 증축될 수도 있고, 새로운 책들이 들어올 수도 있고, 낡은 책들이 치워질 수도 있겠지만, 도서관의 진정한 본질은 근본적으로 불변이었다. 그는 몸을 바치기로 했지만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이곳에서 자신의 장래를 보았다. 장래에 자신이 변화를 겪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었으나, 장래 그 자체가 변화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변화의 도구라고 보았다.
지금까지 자신의 '장래 전망'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장래가 아주 빈약하게 들린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마치 내가 회사 퇴사하고 싶다고 말하고, 그러고 나면 늘 따라오면 "뭘 하고 싶은데?"라는 질문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는 모습이 떠올랐다. 20대에게 "장래"란 어떻게 다가오는 걸까. 앞으로 펼쳐질 것으로 예상하는거겠지?
 
 

#3. 언어와 문학

우선 문법의 논리성이 느껴졌고, 그것이 스스로 퍼져나가 언어 전반에 스며들어서 인간의 생각을 지탱하게 된 과정을 알 것 같았다.

 문법이나 언어가 우리에게 주는 의미. 우리의 생각을 담는 그릇이니까.

그는 길고 긴 낮과 밤을 방에서 혼자 보내며 자신의 일그러진 몸이 강요하는 한계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책을 읽다가 점차 자유로움을 느끼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가 이 자유의 본질을 이해하게 됨에 따라 그가 느끼는 자유로움도 더욱 강렬해졌다.
문학, 언어, 정밀하고 기묘하며 뜻밖의 조합을 이룬 글 속에서 그 무엇보다 검고 그 무엇보다 차가운 글자를 통해 저절로 모습을 드러내는 마음과 정신의 신비, 이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그는 마치 위험하고 부정한 것을 숨기듯 숨겨왔지만, 이제는 드러내기 시작했다.
역사상의 몇 가지 사건들이 우리에게 장애물이 될 것 입니다. 철학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언어학적인 어려움, 종교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어려움, 실질적인 어려움뿐만 아니라 이론적인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받았던 교육이 모두 이런저런 방식으로 우리를 방해할 것입니다. 경험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는 우리의 습관이 우리의 기대치를 결정한 것처럼, 중세 사람들의 기대치도 습관에 의해 결정되었으니까요.

문학은 세상사를 담아내고 있기에 대학에서 문학과 언어를 함께 배우는 것 같다. 세상이라는 겹겹의 포장지 안에 싸여 있는 이야기. 그 이야기 안에는 'stroy' 그 이상이 녹아있다. 내가 이 책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이유도 세계대전 당시의 미국을 잘 모르기 때문이고, 아직 그 나이를 살아보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4. 성찰

그에게는 지금까지 내면을 성찰하는 버릇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의 의도와 동기를 찾아 헤매는 일이 힘들 뿐만 아니라 살짝 싫다는 생각도 들었다. 자신이 자신에게 내놓을 것이 거의 없다는 생각, 내면에서 찾아낼 수 있는 것 또한 거의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가 이렇게 가구를 수리해서 서재에 배치하는 동안 서서히 모양을 다듬고 있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그가 질서 있는 모습으로 정리하던 것도, 현실 속에 실현하고 있는 것도 그 자신이었다. 

삶에서 누구나 느낄 수 있는 감정과 상황을 잘 그려냈다. 내 머릿속이 복잡하고 힘들 때, 그리고 변화가 필요할 때면 가구들을 이리저리 옮기는 내 모습이 보였다.

10년이나 늦기는 했지만, 이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차츰 알게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발견한 새로운 자신은 예전에 상상했던 것보다 더 훌륭하기도 하고 더 못나기도 했다.
그는 연구실에서 책을 읽고 공부를 했다. 그리고 거기서 약간의 위안과 기쁨, 심지어 이렇다 할 목적이 없는 공부에서 예전에 느꼈던 즐거움의 흔적까지도 느낄 수 있었다. (중략) 그는 가끔 이만하면 살 만하다고, 심지어 행복하기까지 하다고 생각했다.

이디스가 그의 성장을 방해했지만, 그는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기에 성장하지 않더라도 그 자체로만에 행복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다. 나 역시 누구도 시키지 않은, 오히려 '일'과는 거리가 먼 이 공부를 하고 있는 이유도 그저 나의 행복과 만족감뿐이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5. 이디스

학교와 가정에서 그녀가 받은 도덕교육은 본질적으로 부정적이었으며, 뭔가를 금지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고, 거의 전적으로 성적인 문제만을 다뤘다. 하지만 성적인 문제를 다룬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은 채, 그런 문제를 간접적으로 언급할 뿐이었다. 다시 말해서, 그녀가 받은 교육의 다른 모든 부분에 성적인 문제가 가득 퍼져 있었다는 뜻이다. 그 교육에 대부분의 에너지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람들이 입 밖으로 내서 말하지 않는 퇴행적인 관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과 가족을 위해 수행해야 하는 의무가 있으며, 그 의무를 반드시 완수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손님들이 가고 나면 그 겉치레가 저절로 무너지고 지친 모습이 드러났다. 그녀는 손님들이 자신을 모욕하고 무시했다는 괜한 상상에 빠져 손님들에 대해 모진 소리를 해댔다. 또한 자신이 용서할 수 없는 실수를 저질렀다며 조용히 필사적으로 그 실수들을 되짚어 보았다. 손님을 치르느라 어질러진 집 안에 꼼짝 않고 앉아서 이런 생각에 빠진 그녀를 월리엄이 달래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녀는 괴로움에 잠겨 그의 말에 단조로운 목소리로 짤막한 대답을 할 뿐이었다.

완전 나와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사고과정을 제 3자가 되어 바라보니 어이없기 짝이 없다.

사실 그녀가 이렇게 새로운 삶의 방향을 찾게 된 책임은 그에게 있었다. 그녀가 그와 함께하는 결혼생활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게 해주지 못했으니까. 따라서 그녀가 그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곳에서 인생의 의미를 찾아 그가 따라갈 수 없는 길을 가는 것은 옳은 일이었다.

이디스와의 결혼생활에서 스토너는 자신을 알아가고, 점차 성장했다. 바로 옆에서 이디스가 이를 몰랐을리 없다. 이디스는 혼자만 뒤쳐져 맴도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열심히 하던 것에 싫증이 나버린 것은 그녀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모른 채 그럴싸해보이는 것을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레이스에게 관여했을지 모른다. 좋은 아버지를 넘어서는 좋은 어머니가 되기 위해서, 그렇게라도 자신의 삶의 의미를 찾고 싶어서 ... 그레이스를 위한 것은 정말로 자신이 원하는 것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6. 슬픔

이제 나이를 먹은 그는 압도적일 정도로 단순해서 대처할 수단이 전혀 없는 문제가 점점 강렬해지는 순간에 도달했다. 자신의 생이 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과연 그랬던 적이 있기는 한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기도 모르게 떠오르곤 했다. 모든 사람이 어느 시기에 직면 하게 되는 의문인 것 같았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도 이 의문이 이토록 비정하게 다가오는지 궁금했다. 이 의문은 슬픔도 함께 가져왔다. 하지만 그것은 그 자신이나 그의 운명과는 별로 상관이 없는 일반적인 슬픔이었다. (그의 생각에는 그런 것 같았다). 문제의 의문이 지금 자신이 직면한 가장 뻔한 원인, 즉 자신의 삶에서 튀어나온 것인지도 확실히 알 수 없었다. 그가 생각하기에 나이를 먹은 탓에, 그가 우연히 겪은 일들과 주변 상황이 강렬한 탓에, 자신이 그 일들을 나름대로 이해하게 된 탓에 그런 의문이 생겨난 것 같다.  그는 보잘것없는 지식을 얻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서 우울하고 역설적인 기쁨을 느꼈다. 결국은 모든 것이, 심지어 그에게 이런 지식을 알려준 배움까지도 무익하고 공허하며, 궁극적으로는 배움으로도 변하지 않는 무로 졸아드는 것 같다는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워커의 면접이 그에게 이토록 큰 영향을 줄 줄 알았다면, 스토너는 이런 선택을 했을까? 핀치의 말대로 결국 워커는 대학원에 계속 다녔다. 달라진건 로맥스와 스토너의 사이이며, 스토너가 이 학교에서 더이상 올라갈 자리를 얻을 기회를 얻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 뿐이었다. 이 모든 과정의 출발은 스토너의 '신념'이었다.

 
 

#7. 위로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습니다. 살다 보면 그런 일도 있는 법이죠. 세월이 흐르면 다 잘 풀릴겁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니에요." 이 말을 하고 나자 갑자기 그것이 정말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 되었다. 순간적으로 자기 말에 담긴 진실을 느낀 그는 몇 달 만에 처음으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던 정말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절망이 그토록 무거웠다는 것조차 제대로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마음이 들뜨다 못해 현기증이 날 것만 같고, 금방이라도 웃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그는 다시 말했다. "별로 중요한 일이 아닙니다."

때론 이런게 필요한 것 같다. 내 잘못과 내 과오, 혹은 나의 불행도 '타인'에게 위로하듯이 말하면 스스로 위안을 얻는다. 타인에게는 이토록 관대하고 따뜻하면서 왜 나한텐 그럴 수 없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함께 찾아온다.
 
 

#8. 사랑

나이 마흔셋에 월리엄 스토너는 다른 사람들이 훨씬 더 어린 나이에 이미 배운 것을 배웠다. 첫사랑이 곧 마지막 사랑은 아니며, 사랑은 종착역이 아니라 사람들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
젊다 못해 어렸을 때 스토너는 사랑이란 운 좋은 사람이나 찾아낼 수 있는 절대적인 상태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른이 된 뒤에는 사랑이란 거짓 종교가 말하는 천국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재미있지만 믿을 수 없다는 시선으로, 부드럽고 친숙한 경멸로, 그리고 당황스러운 향수로 바라보아야 하는 것. 이제 중년이 된 그는 사랑이란 은총도 환상도 아니라는 것을 조금씩 깨닫기 시작했다. 사랑이란 무언가가 되어가는 행위, 순간순간 하루하루 의지와 지성과 마음으로 창조되고 수정되는 상태였다.
어렸을 때 두 사람은 마음과 몸이 별개의 것이며 서로 적대적인 관계라고 배우며 자랐다. 그래서 별로 깊이 생각해 보지도 않고, 둘 중 하나를 선택하려면 나머지 하나를 희생하는 수밖에 없다고 당연한 듯이 믿고 있었다.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강화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은 한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진실을 깨닫기도 전에 체험이 먼저 찾아왔으므로, 이 새로운 발견이 오로지 두 사람만의 것처럼 보였다. 두사람은 이처럼 '기존 관념'이 기이하게 달라진 사례들을 모아 보물처럼 간직해두기 시작했다. 그것이 이것이 기존 관념을 고수하는 세상으로부터 두 사람을 분리시키는 데 일조했다. 또한 두 사람이 야단스럽지는 않지만 감동을 느끼면서 서로에게 더 가까워지는 데에도 일조했다.

 

#9. 전쟁 속의 일상

아처 슬론과 마찬가지로 그도 세상을 미지의 종말로 몰고 가는 비합리적이고 어두운 힘에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것이 무익한 낭비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아처 슬론과 달리 스토너는 연민과 사랑의 감정을 향해 조금 뒤로 물러났기 때문에 눈앞의 급박한 흐름에 휩쓸리지 않았다. 과거 위기와 절망의 순간에 그랬던 것처럼 이번에도 그는 대학이라는 기관에 구현되어 있는 신중한 믿음에 다시 의지했다. 속으로는 그 믿음이라는 것이 별것 아니라고 되뇌었지만, 이제 자신이 손에 쥔 것이 그것뿐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주 깊고 강렬한 여러 감정들이 그 안에 혼합되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차마 견딜 수 없기 때문에 인정할 수도 없는 감정들이었다. 그를 강타한 것은 국가적인 비극에 대한 감정이었다. 거기서 느낀 경악과 비통함이 무엇에든 배어 있어서 개인적인 비극이나 불행은 다른 세상의 일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그들이 처해 있는 전체적인 상황의 무게가 워낙 거대했기 때문에 개인적인 일들에 관한 느낌도 한층 강렬해졌다.
그동안 내내 그는 강의와 연구를 계속했지만, 때로는 맹렬한 폭풍 앞에서 등을 구부리는 것이나 질 나쁜 성냥의 흐릿한 불꽃을 양손으로 오목하게 감싸는 것처럼 소용없는 짓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0. 옮긴이의 말

독한 삶이든, 화려한 삶이든, 스토너처럼 인내하는 수수한 삶이든 마지막에 남는 질문은 똑같다는 것. 그는 죽음을 앞둔 병상에서 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되뇐다. "넌 무엇을 기대했나?"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면 저마다 생각에 잠길 수밖에 없을 것 같다. '나는 과연 내 인생에서 무엇을 기대했나?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하고. 자꾸 독하고 그악스러운 이야기에만 익숙해지고 있는 우리에게는 이런 성찰이 무엇보다도 필요하다.
그는 냉정하고 이성적으로 남들 눈에 틀림없이 실패작으로 보일 자신의 삶을 관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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